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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형일의 실리콘 밸리 스토리 : Episode2

by CBL 2018. 7. 19.

사진. 프레드릭 터만 교수(빌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의 지도교수)




Episode 2.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 "프레데릭 테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리콘 밸리의 불씨를 만든 프레드 테르만(Fred Terman)에 대해 모른다. 조지 루카스의 불후의 명작 <스타워즈> 시리즈가 4편쯤에 이르러 우리에게 알려졌듯이, 실리콘 밸리의 이야기도 70년대의 애플사나 인텔사의 천재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리콘 밸리 신화의 진짜 뿌리는 훨씬 더 내려간다.

50년 전 동부의 아이비리그와 MIT대의 번영에 심한 콜플렉스를 앓고 있던 스탠포드 대학과 이곳 공대를 책임지고 있던 테르만 교수의 지극히 개인적인 프로젝트에 의해 지금의 실리콘 제국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라는 괴물이 탄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실리콘 밸리는 몇몇의 거부와 평범한 농부들이 일상을 일궈가는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일명 '환희의 밸리(The Valley of Heart's Delight)'로 불리던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의 지중해성 기후에 적합한 살구나무와 호두나무로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 지대로 형성된 서부의 전형적인 전원도시였던 것이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산타크루즈 해변이 위치해 있고, 북쪽으로는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를 끼고 있는 이 '환희의 밸리'는 2, 30년대의 경제 대공항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 뜻밖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930년대 이 지역의 대표적인 대학인 스탠포드대와 갤리포니아대의 버클리 캠퍼스에서 배출된 대부분의 인재들은 학부를 졸업하고 동부의 대도시로 나가 그들의 꿈을 펼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동부의 대도시인 뉴욕, 시카고, 워싱턴, 보스턴 등에 비해 산업 기반이 현저하게 뒤쳐진 캘리포니아의 작은 전원도시에 유능한 젊은이들이 정착할리 만무했다.

이것이 스탠포드 공대의 학과장을 맡고 있던 테르만 교수에게는 용납하기 힘든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팔로알토 지역에 마땅히 취업할 기반이 없어 동부로 떠나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이를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작은 프로젝트 하나를 추진하게 된다. 30년대는 라디오 산업이 최첨단의 전자산업으로 각광 받던 시대였고, 테르만 교수는 자신의 전공과 일치하는 라디오 기술을 팔로알토 시를 중심으로 정착시키고, 나아가 제자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모종의 일을 꾸미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동부에서 활약하고 있던 빌 휴렛과 데이빗 팩커드에게 연락을 취하게 되고, 이들이 고향에 돌아와 설립한 휴렛-팩커드 사의 성공은 초창기 실리콘 밸리의 형성 과정에 디딤돌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동시에 이들의 성공은 테르만 교수에게 팔로알토라는 작은 도시에 전자 산업이 형성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만나는 제자들마다 과수원 대신 하이-테크놀로지 사업에 뛰어들 것을 종용했다.

곧이어 터진 세계 제2차 대전은 미 연방정부에게 캘리포니아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태평양을 끼고 있는 실리콘 밸리는 방위산업체들의 번영에 따라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캘리포니아는 더 이상 과거의 캘리포니아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연방 정부는 캘리포니아의 3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러스, 샌디에고에 미국의 대표적인 방위산업체를 유치했고, 실리콘 밸리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록히드사의 설립은 팔로알토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중, 소규모의 전자업체들에게 직접적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해 주었고, 간접적으로는 테르만 교수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나아가, 테르만 교수의 진가는 2차 대전을 전후로 팽창해 가는 팔로알토시의 테크놀로지 산업을 스탠포드대의 번영과 접목시키기 위해 창안한 독특한 프로젝트에서 또한번 발휘된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스탠포드 공대를 동부의 명문 MIT 공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동부에서 활약하던 팔로알트 지역 출신 인재들을 철새들처럼고향으로 복귀시키는 기현상까지 낳게 했다. 이쯤되면 테르만 교수가 주창한 프로젝트가 몹시 궁금해진다. 프로젝트의 내용인 즉, 팔로알토시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스탠포드대가 자교(自校)의 이익에 부합되며, 하이-테크놀로지를 연구하는 조직이라는 두 조건을 갖춘 기업들에게는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토지를 영구 임대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휴렛팩커드, 이스트만코닥, 제너럴일렉트릭(GE), 쇼클리 반도체연구소 등이 그 때 기회를 잡은 주인공들이며, 이 프로젝트는 팔로알토 시에서 멘로파크까지 확대되면서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상징으로 떠오른 스탠포드 인더스트리얼 파크(Stanford Industrial Park)로 성장시키게 된다.

특히 테르만 교수의 설득에 의해 스탠포드대의 교수로 복귀한 윌리엄 쇼클리와 그가 운영하던 쇼클리 트랜지스터 연구소는 훗날 수십 개의 반도체 기업으로 스핀오프를 시작하면서, 인텔이라는 작은 회사로 하여금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다이내믹 랜덤 액세스 메모리(DRAM)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제공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레드 테르만 교수의 작은 콤플렉스가 실리콘 밸리의 프라이로 변모해 버린 것이다. 스탠포드대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는 미국 최고의 사립대학과 주립대학으로 우뚝 솟았으며, 현재 보스턴을 중심으로 한 동부의 실리콘 밸리인 '루트 128' 지역은 실리콘 밸리의 발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프레드 테르만은 진정한 20세기의 엔지니어였다. 그가 만약 엔지니어의 순수한 목적 대신, 사업가적인 취지로 그의 프로젝트를 추진했다면 오늘날 실리콘 밸리가 지니고 있는 낭만과 로맨스는 상당부분 탈색되었을 것이며, 아마추어 벤처리스트들의 행진이 일찌감치 그 효력을 다해 버렸을 것이다. 그는 1982년 레이저 프린터와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가 또 다시 실리콘 밸리를 팽창시킬 무렵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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